동대문소개

유래및 연혁

유래 - 제기동

제기동이란 동 이름은 ‘제사를 지내는 자리(터)’ 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제기동은 본래 춘분과 추분에 나라의 임금이 직접 행차하시어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데에서 비롯된 제단(祭壇:先農壇)이 있었다하여 ‘제터’ 또는 ‘계터’ 마을이라 불리었다.
계(제)터 마을을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이 제기동이다.제기동은 ‘제사를 지내는 터’에서 비롯되었듯이 그 제사를 올리던 터가 바로 선농단이다. 선농단은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농본정책을 펴, 일찍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친 제신농씨(帝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이다.
제사는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매년 경칩이 지난 뒤 길한 날을 가려 왕이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고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사를 지내고나서 국왕을 비롯하여 조정 중신,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차례로 밭을 간 뒤, 국왕이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소를 잡고(쉼표 삭제) 밥과 술을 내렸으며 그 국밥을 '선농단'에서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탕'→ '설롱탕' →'설렁탕'으로 변한 것이 오늘날 설렁탕의 유래이다.

연혁

제기동(祭基洞)은 조선조 초기부터 한성부(漢城府)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해 있었으나, 조선조 영조 27년(1751)에 반포「도성삼군문분계총록」을 보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 제기리계(祭基리계)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갑오개혁(1894)때에는 동서(東暑) 인창방 동소문외계(東小門外 ) 제기리로 불렸고 일제시대 때인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바꾸고 도성 밖동(洞)을 8면 (용산,서강,두모,숭신,인창,은평,연희,한지)으로 개편, 재기리는 인창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 일제가 동 이름과 구역을 축소 조정할 때 제기리는 성밖이라는 이유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4월 1일(총독부령제8호) 경성부 구역확정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 제기동은 일제식 땅이름으로 제기정(祭基町)으로 바뀌었다.
광복 다음해인 1946년 10월1일 일제식 땅이름을 정리할 때 제기정을 현재의 제기동으로 고쳤다.
조선왕조때 현 경동시장 일대는 정릉천과 청계천의 풍부한 물로 미나리밭을 이루고 있었다.
1946년 미군정 당시 "원목 조합터"라 불리기도 했으며 건축재료 최대공급처이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사설철도 였던 경춘선의 시발역인 성동역이 오늘의 미도파 청량리점 자리에 있었다.
8·15광복을 전후하여 성동역 주위에는 경춘선과 중앙선을 이용하여 강원도,경상도 등지에서 올라오는 한약재를 취급하는 한약상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오늘날 경동약령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조선조때 구휼기관이던 보제원(현 안암로터리부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유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