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의 옛 이야기/인물
행복을 여는 동대문구
옛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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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 유관에 얽힌 이야기
청백리의 표상, 효자 유계문, 검소하고 근면한 유관선생, 너무나 서민적인 하정 유관, '우산각 골'과 하정 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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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천, 안감내 다리에 얽힌 옛날 이야기
지금은 서울 한가운데로 한강이 흐르고 있지만 예전 조선시대의 한양인 그 당시 서울 한가운데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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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에 얽힌 옛날 이야기
우리구 회기동, 현재는 천장산 아래 경희대학교가 위치하여 큰 터를 잡고 교육의 요람으로써 뿐 아니라 동서양방을 겸한 병원, 예술 문화공연장인 평화의 전당 등을 건축하여 그 일대가 번창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가 있던 곳으로 '회묘리'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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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 얽힌 옛이야기
조선초기 수도인 한양에는 외곽이 토성으로 쌓여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커다란 대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4대문 안을 문안 또는 성안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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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보리밥과 가평현감
조선시대 선조대왕때 영의정을 지냈던 오성 이항복 대감께서 경기도 가평으로 여름휴가를 가던 길이었다. 대감께서 공무가 아닌 사행길이라 평복 차림으로 그 당시 고관들이 행차할 때 타던 가마 대신에 조랑말을 타고 하인 한명을 앞세워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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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창마을 떡장수
현재 서울시립대학교가 위치한 전농동에서 정신병원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넘어 가려면 시멘트다리를 넘어야 하는데 이 다리를 가리켜 '떡전교' 또는 '떡전다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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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귀비의 무덤, 영휘원
우리 구 청량리2동으로 편입된 홍릉 일대는 원래 조선왕조 왕가 소유 국유림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구획정리가 되어서 분간하기가 쉽지 않지만 홍릉 일대는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내려 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야산지대로서 왕가에서 주로 능 터로 사용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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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왕세손의 무덤, 숭인원
홍릉에 있는 영휘원 경내 입구에는 또 하나의 큰 무덤이 있으니 곧 비운의 왕세자 이은(垠)의 아들 즉 순종의 왕세손인 이진(晉)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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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롱탕인가, 설렁탕인가
모든 것이 음력(陰曆)에 기초했던 옛날에는 1년을 24절기로 나누었다. 긴 겨울이 거의 끝날 무렵에 봄에 들어선다는 입춘(立春)이 오면 이어서 겨우내 내렸던 눈 대신에 비가 온다는 뜻의 우수(雨水)가 지나고 보름 뒤에 긴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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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처음 다녔던 길, 청량리
지금은 서울시내 곳곳이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고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약 100년 전만 해도 서울거리에는 사람이 끌거나 밀어서 움직이는 인력거가 가장 편리하고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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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원에서 하룻밤 쉬어 갑시다
조선시대 흥인문(동대문) 밖 3리 지점에 보제원이 있었다. 보제원이란 명칭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구휼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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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승천한 용두리 찬물내기
풍수지리적으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은 북악산 줄기에서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구릉 가운데 하나인 산자락을 중심으로 생긴 분지에 동네가 형성되었고, 동네를 감싸고 지나가는 뒷산은 마치 용이 꿈틀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종로쪽으로 향한 동네의 진입부분은 용의 머리에 해당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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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이 김선달의 용두리 찬물내기 물장사
평양에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이곳 저곳을 유람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동강물을 팔아 챙긴 돈 4000냥 중에 일부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기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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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현재 휘경2동, 전농동, 답십리에 걸쳐있는 배봉산은 예전에는 경기도 양주 땅이었다. 이 산이 배봉산(拜峰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사도세자의 무덤이 그곳에 있어 서울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향하여 절(拜)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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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의 충절이 서린 왕산로
나라가 어찌 이렇게 허망하게 왜놈들에게 유린당할 수 있습니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한데 백성들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