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에 얽힌 옛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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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수도인 한양에는 외곽이 토성으로 쌓여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커다란 대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4대문 안을 문안 또는 성안이라 하였다.
당시만 해도 4대문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 밤이 되어 일정시각이 되면 통표(통행증)가 없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대문을 통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인 송악(현재의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태조가 즉위한지 3년째(1394) 였으며, 이듬해 봄부터 도성축조계획을 세워 한양 주변에 성을 쌓고 4방에 한 개씩 큰 대문을 만들어 달았다.
기록에 의하면 동대문은 태조 5년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그 해 여름에 장맛비로 토성이 붕괴되어 다음 해인 태조 6년 1월 27일에 태조가 친히 동대문에 나가 옹성의 터를 보고 같은 해 4월 28일에도 왕이 친히 동대문에 나가 옹성을 둘러보고 성을 돌아 동소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그 해 4월에 완공된 듯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4방향을 가리킬 때 동·서·남·북 순서로 말하듯이 고려 패망의 원인인 불교의 횡포를 처단하고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5상(五常) 중 4덕(德)을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하여 여기에 신(信)을 더하여 5상이라 하였다.

그래서 동쪽의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

다시말해 仁·義·禮·智 한 글자씩 각 대문에 넣어 그 이름을 만들고 오상(五常)의 신(信)은 서울 한가운데인 광화문 앞의 보신각(普信閣)으로 이름 지었다. 그 후 동대문인 흥인문은 서울의 지세가 서·남·북은 산과 고지로 되어 있어 균형이 잡히나 동대문이 있는 동쪽은 지대가 턱없이 낮아서 그 기운을 메우기 위해 갈지(之)자를 넣어 '흥인지문'이라 하고 한 줄로 세워서 글씨를 쓴 다른 대문의 현판과는 달리 '흥인지문'의 현판은 가로 두 줄로 써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모자라는 기(氣)을 보충토록 했다 한다.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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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기록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동대문은 조선후기에 와서도 여러 번에 걸쳐 개축을 하고 보수를 하여 튼튼하지만 조선초기의 동대문은 토성 위에 둘러싸여 있는 나무대문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강원도 영월땅 청령포로 귀양을 떠난 후였다.

그때 단종의 왕비였던 송씨는 단종을 따라서 함께 가지 못하고 궁궐에서 쫓겨난 후 동대문 밖에 있는 정업원 암자에 홀로 남아 아침저녁으로 멀리 강원도 영월땅에 계신 낭군님인 단종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 딱한 사정이 정업원 근처 민가에 알려지자 동대문 밖에 사는 마음씨 착한 아낙네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서로 다투어가며 정업원에 살고 있는 단종비 송씨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그러나 가난한 민초들인 그들이 단종비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집에서 키우는 닭 한 마리 정도였고 아니면 쌀이나 보리쌀 한 되 또는 집 근처 텃밭에서 나는 푸성귀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깥에 나갔던 상궁이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면서 단종비 송씨에게 아뢰었다.
"마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생겼다 하옵니다."
"기이한 일이라니?"
"…"
"어서, 말해 보거라. 기이한 일이 생겼다 하지 않았느냐?"
"글쎄 동대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옵니다."
상궁은 송씨의 눈치를 보며 겨우 고했다.
"아니! 뭐야? 동대문이 기울어졌다 했느냐?"
"그렇습니다. 마마."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종비 송씨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예전부터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는 말을 자주 들은 바 있었다.
"또 무슨 변이 나려고 그러는고?"
송씨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낭군인 단종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쳐갔다.
"동대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 하더냐?"
송씨가 상궁 나인에게 물었다.
"마마…공교롭게도 동남쪽이라 하옵니다."
"아니! 뭬야? 동남쪽이라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동남쪽이라면? 상감마마께서 가 계신 강원도 영월쪽이 동남쪽이 아니더냐!"
안 그래도 요 며칠사이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송씨로서는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단종비 송씨는 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는 상궁 나인의 말을 듣고 그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단종은 사약을 받고 말았다. 인조반정 때도 동대문은 기울었다.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뜬 후 다시 100여 년이 지난 광해군 말년에 동대문이 다시 또 기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종 때와는 달리 동남쪽이 아니라 북서쪽으로 동대문이 기울었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가뜩이나 광해군의 폭거에 뒤숭숭하던 민심은 타는 불에 기름을 갖다 부은 듯이 전국적으로 이 소문을 퍼뜨렸다.
"동대문이 기울면 국난이 온다는 데 이제 곧 나라에 큰 변고가 나겠지."
"이번에는 동대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 하던가?"
"북쪽으로 기울었다지?"
"북쪽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삼삼오오로 모여 입소문을 키우며 얘기를 나눴다.
자연히 민심이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광해군 곁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 간신 이이첨이 포졸들을 풀어서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잡아 엄벌을 처했다.

그러나 그렀다고 해서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이 불식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그 해 동대문이 북서쪽으로 기울었던 그대로 한양의 북서쪽인 홍제원에서 인조를 옹립하는 반정군이 군사를 일으켜 간신 이이첨과 광해군을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 또한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대 사건이었다.

구한말 임오군란 때도 동대문은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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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임오군란 때도 동대문은 기울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구한말에도 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 그 당시 고종은 쇄국정책을 고집했던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화정책을 쓰고 있을 때였다.
"왜놈들이 우리 땅을 맘대로 유린하고 있으니 어찌 조상들이 노하지 않겠소?"
"그래도 대원군께서 정치는 잘했어. 그때는 멀쩡하던 동대문이 이제 와서 왜 기울겠어?"
"민씨 일파들이 나라를 들어먹으니까 경고를 주는 것이 아니겠어?"
다시 또 민심이 흉흉해 지기 시작했다.

고종 19년(1882) 6월, 결국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명성황후인 민씨 일파에 의해 유지되던 민씨정권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구식 군대를 도태시키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했다. 일본군대를 본뜬 군제였다.

그 당시 서울에 있었던 구식 군대는 실상 군인이라 하기보다는 도시 하층민, 다시 말해 영세 소상인이나 영세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 노동자·농민 중에서 충원된 사람들로서 각자 가족을 거느리기 위해 부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복무하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신식군대가 발족하자 구식군영 군인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소속된 군인들에게는 무기며 의복 등 여러 면에서 좋은 대우를 해주고 봉급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지급하는데 반하여 구식군영 군인들은 자꾸만 실직을 당하여 불안해 하면서도 몇 달치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오군란이 있기 전에 이미 구식 군인들 사이에는 동요와 반항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군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881년 2건의 폭동준비 사건이 있었다.
군인들의 움직임이 아니다 싶었던지 정부에서 약간의 급료를 쌀로 지급하여 구식군영 군인들을 무마하려고 1882년 6월에 밀린 급료 1년치 중에서 1개월 분을 지급했다.
그러나 군인들이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있고 또한 양도 규정에 휠씬 못 미치자 군인들이 끝내 분노를 못 이기고 배급 책임자를 구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배급을 담당한 선혜청의 잘못을 시정하지는 아니하고 오히려 난동의 주동자를 잡아들이자 마침내 6월 9일 군인들이 무기고를 점령하고 일제히 봉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선혜청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선혜청 책임자인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질렀다. 또한 별기군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폐쇄하였다. 다음날은 여세를 몰아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대원군의 친형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하여 민씨 일파에 의해 조종당했던 고관들을 살해하였다.
그 당시 명성황후 민비는 군란를 피해 변장을 하고 창덕궁을 빠져 나와 장호원으로 피신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장호원은 동대문이 기울었던 서울의 동남쪽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