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 유관에 얽힌 이야기

행복을 여는 동대문구

하정 유관에 얽힌 이야기

목록

청백리의 표상

선왕조 때 대표적인 청백리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하정 유관선생 댁이 현재 신설동 근처에 있었다. '청백리'라는 말은 한마디로 '깨끗한 관리', 요즈음 말로 바꾸면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정직한 성품의 모범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정 유관선생은 문화유씨(柳氏) 명문가 출신으로 고려 중기의 유명한 문신(文臣) 유공권의 후예이며, 그의 증조 할아버지 또한 좌우위상장군 유성비였으니 그의 가문은 그야말로 문무(文武)을 겸한 명문가라 하겠다.
유관 공은 고려 말 충목왕(재위 1337∼1348) 때 태어나 공민왕 20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 이래 고려조가 망할 때까지 20년 동안 꾸준히 관직에 있으면서 모나지 않는 둥글둥글한 성격과 공정한 처사로 동료 관원들은 물론이고 많은 백성들로부터도 추앙을 받았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어 병조이랑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세종 9년에 그가 81세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네 임금을 모시고 성균관 대사성, 강원도·전라도 관찰사(요즈음 관직으로는 도지사)를 역임했다.

그의 한 점 티와 부끄럼이 없는 행동이며 검소한 생활태도가 많은 이들의 신망을 불러 일으켰으며 국왕 이하 모든 관민이 그를 국노(國老)로 받들고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세종대왕께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푸는 자리를 즉시 파하고 몸소 흰옷으로 갈아입고 홍화문 밖으로 나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공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식을 행했다는 왕조실록에 쓰여있다.

세종대왕께서 친히 지으신 제문(祭文)을 보면 <공께서는 문 앞에서 사사로운 청을 거절하니 고방에는 남은 물건이 없고 직위가 높았으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기풍이 돋보이셨으며 덕을 높이 존중 받으면서도 교만하거나 인색한 태도가 없어 과연 모든 선비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 고 되어 있다.

  • 청백리 ① 청백한 관리
    ② 의정부·육조·경조의 정2품 또는 종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우두머리 가 천거한 청렴한 벼슬아치
  • 충목왕고려 제29대 왕(재위 1337∼1348) 휘는 흥(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때 원나라에 의하여 왕으로 봉하여져 즉위함. 어머니 덕녕 공주가 섭정하였음.
  • 홍화문창경궁의 정문,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건물로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임.
  • 제문죽은 이에 대하여 슬픈 뜻을 나타낸 글

효자 유계문

효자 유계문 이미지
장안에서 이름난 효자 유계문

하정 유관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자라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물론 그랬겠지만 장안에서 이름난 효자였다.
아침과 저녁, 어디를 나가거나 다녀서 들어올 때마다 아버지에게 꼭꼭 문안인사를 드렸으며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버지께서 주무시는 온돌 방바닥에 찬 기운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손을 넣어보는 매우 착한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조선조 초기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아버지와 함께 관직을 맡았는데 그 아들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 행실이 바르고 언행이 점잖아 그의 아버지 유관을 돋보이게 했다.

세종 8년(1426)에 그 아들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현재는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분리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합쳐져 있어 충청도 땅은 매우 넓었으며 관찰사 라는 직책은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자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 유계문이 한사코 관찰사직을 사양하며 발령을 받은 임지에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유관공이 아들을 불러 그 사유를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임금께서 주시는 영광스러운 벼슬인 관찰사를 마다하느냐 관찰사란 직책은 매우 중한 자리이고 아무나 하고 싶다고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란 것쯤은 너도 관직을 오래 했으니 잘 알 것 아니냐?"며 나무랐다.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죄송하다 말하기 전에 네가 관찰사 직책을 맡을 수 없는 이유부터 말해 보아라."

아버지가 자꾸만 다그치자 아들 유계문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다만 불효를 저지르는 일을 삼가고자 할뿐입니다."
"아니, 뭐야? 불효를 저지른다? 관찰사를 맡는 것이 어째서 불효가 된다는 말이냐?
나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사실대로 아뢰어라."
아무리 성품이 온화한 유관 공이었지만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제서야 아들이 대답을 했다.
"저는 아버님 존함을 밟는 관직만큼은 안 하기로 결심한 바 있습니다. 그런 불효를 어찌 자식으로서 할 수가 있습니까?"
"아니, 내 이름을 밟는 직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관찰사란 직명에 아버님 함자인 볼 관(觀)자가 있지 않습니까? 어찌 제가 감히 존경스런 아버님의 함자를 쓰는 직책을 맡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치 아버님 이름을 딛고서 감투를 쓰는 것 같아 그 벼슬만은 사양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 미련한 자식아. 그 사표는 즉시 반려다. 대신 내가 이름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
"…"
"볼 관(觀)자를 즉시 너그러울 관(寬)자로 바꾸겠다. 자식이 잘된다면 아비가 이름을 바꾼들 무슨 흉이 되겠느냐? 내 이름은 오늘부터 유관(柳寬)이니라."

이리하여 그동안 공께서 써 오던 이름자를 중년에 들어서 자식의 출세를 위하여 바꾼 것인데 사실 공의 성품을 보거나 처신을 후세에서 살펴보면 날카롭게 사물을 본다는 뜻의 '볼 관(觀)'자 보다는 성격이 너그럽다고 쓰이는 '너그러울 관(寬)'자가 매우 합당한 이름이라 여겨진다.

검소하고 근면한 유관선생

검소하고 근면한 유관선생 이미지
유관은 흥인지문(현재의 동대문) 밖에 안방과 사랑채가 나란히 붙어있는 초가집에 살았다.

「동국여지비고」라는 역사책을 보면 공의 직급이 차츰 높아져 정승 반열에 올라 궁색을 면할 정도로 국록(요즈음 말로 국가에서 주는 봉급)을 받았음에도 그가 하도 청빈하게 살다 보니 집에 바깥대문과 담이 없었다 한다.

관직에 있는 다른 이들이 공에게 "영감께서 이제는 정승 반열에 오르시어 남의 이목도 있고 하니 집을 옮기시거나 수리를 좀 해서 쓰는 것이 좋을 듯 하오이다."하며 넌지시 말을 건네면 "아직도 집이 쓸만하고 손때 묻은 것들이 많다 보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하며 회피를 했지만 공께서는 어렵게 사는 이웃이나 친척들을 돕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태종 임금께서 정승인 유관이 초가집에 대문도 담도 없이 청빈하게 산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공이 잠든 밤을 이용하여 몰래 선공감을 보내어 울타리를 처 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공께서는 한겨울에도 거의 맨발로 사셨다.

그 당시에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무명솜을 다진 버선을 양말처럼 신었었는데 공께서는 버선을 아껴 신느라고 집안에 들어오면 여름이나 겨울에도 항상 맨발로 지냈다.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찾아오면 먹던 밥알을 삼키는 대신 숟가락에 밥알을 뱉어놓고 맨발에 짚신을 신고서 마당으로 나섰다. 찾아간 사람이 송구스러워서 "아니, 정승 어른께서 이러시면 저희는 어쩌란 말입니까? 면구스럽습니다."하면 "이 사람들 좀 보게나. 자네들은 사람인 나를 보러 오는 것이지 벼슬 사는 나를 보러 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집에는 오지 말았어야지." 평소에 그저 공정무사하고 청렴결백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찾아가기는 했지만 첫 말부터 그렇게 나오는데 무슨 낯으로 사사로운 부탁을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공께서는 무척 부지런한 분이셨다 한다.

집 앞에서 손수 밭을 일구시어 거름을 갖다 주고 채소나 푸성귀를 심어 반찬으로 썼다.
한번은 여름에 누가 공을 찾아갔더니 반색을 하면서
"자네 마침 때맞춰서 잘 왔네."하시는 것이었다.
"…"
"지금 밭에 잡초가 너무 성해서 내가 김을 매러 나가는 길인데 혼자 갈려니 너무 심심해서 누구 동무해서 갈 사람이 없나 생각 중이었어."
"하지만 전…"
"상관없어. 자네랑 나랑 같이 김을 매면서 찾아온 용건을 얘기하면 되지 않은가? 더운데 방안에 틀어 박혀서 부채질하면서 얘기하는 것 보다 맑은 바람 쐬면서 김을 매며 얘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생산적이고 인간적인가. 그렇게 하세나."
"저요, 저는 그런 게 아니고 밭일을 한번도…."
"아니! 뭐라고 일을 하기 싫다고? 그럼 삼시 세 때를 먹지를 말든지 해야지. 자네가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무릇 정치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정치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한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일을 여러 가지 한몫 겸해서 해야지. 일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서로간에 정도 들고 또 일을 다하고 나서 등목도 함께 한다면…."

그렇게까지 나오는 데야 농사일을 하지 않는 것이 선비요 관리라 생각했던 젊은 선비라 할지라도 꼼짝없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고 꿈지럭거릴 수 있다면 일을 해야지. 일 중에는 천하지대본 (天下之大本)이라고 할 농사가 제일이지. 안 그런가? 농부의 마음, 곧 농심(農心)이면 무불성사(無不成事)라. 안되는 일이 없어. 정직하고 근면한 마음이지. 원인과 결과가 있고 그 결과는 뭇 백성을 먹고 살게 하고… 땀 흘려 일을 하는 것은 정승이나 농부나 같지. 아니 농부 중에 제일로 치는 농부는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이야. 자식 농사를 지으니까 말이야. 가르치기만 하면 사람이라는 결실을 후에 거두니까 말이야!"
이것이 그의 인생관이었고 또 교육관이었다.

너무나 서민적인 하정 유관

시중을 드는 종을 여럿 거느리고 솟을대문과 높은 담장을 두른 고관댁들과는 달리 유정승 집에는 대문이나 담이 없었으므로 누구나 쉽게 유정승 집을 드나들 수 있었다.

때로는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을 찾아온 시골 선비들도 들렀고 또한 양반집 자제나 그를 숭모하는 젊은 관원들도 선생의 높은 학문과 경륜을 배우기 위해 유정승 댁을 찾아왔다.
유정승은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면 양반과 서민, 직급의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고 만나주었다.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명문가의 아들도 있었고, 시골 농부나 장사꾼의 아들도 있었다.
'유정승은 누구나 가르침을 요청하는 이에게는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가르쳐 준다더라'하는 소문이 두루 퍼지자 많은 이들이 유정승을 찾아와 배우기를 간청했다.

"그래, 자네는 내게 무엇을 배우러 찾아 왔는고?"
자기를 찾아온 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그의 부모 이름을 묻거나 신분을 묻는 법이 결코 없었다.
"저는 어디에 사는 누구이고 저의 조부님은 통훈대부이신 ○○○이십니다."해도
"자네가 내게 제자가 되고자 청했으니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지 나는 자네가 누구의 손자이든 관계치 아니하네." 하며 그의 얘기 듣기를 사양했다고 한다.

유정승은 또한 가난한 이웃이나 친척들을 돕거나 좋은 일에 재물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저희 마을에 개울이 있어 큰물 때마다 통행이 불편하여 마을사람들이 다리를 놓고자 하는데 경비가 부족합니다." 하면 찾아온 이의 입에서 도와 달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런 것은 정치를 하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여 나라에서 다리를 놓아줘야 할 것을 기특하게도 백성들이 세운다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도 조금 보태주지."하며 선뜻 돈을 내놓았다.

"저희 선대 6대조께서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지내셨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셨는데 그 어른의 사당을 고향 땅에 세우려고 하는데 집안 형편이 궁색하여 도움을 청합니다." 하면 "뿌리를 찾고 조상을 기린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 내 조금 보탬세."하며 돈을 주었다.

'우산각 골'과 하정 유관

'우산각 골'과 하정 유관 이미지
청렴결백한 하정 유관

하정 유관 공은 성품이 워낙 청렴결백하여 부정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재물을 탐내지 않다 보니 그가 가진 재산이란 방 2칸짜리 초가집 뿐이었고 수중에 있는 돈이란 나라에서 주는 급료 뿐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과 친척들을 돌보아 주다 보니 궁색했고 심지어는 그를 찾아와 수시로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박정하게 대할 수 없어 조금씩 나누어주다 보니 그는 항상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남의 문중에서 사당을 짓겠다고 찾아와도 도와주고 마을에 다리나 서당을 짓는다고 도움을 청하면,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되고 초석이 될 인재를 기르는 일인데 교육자라 자처하는 내가 어찌 인색할 수 있으리요."하면서 돈을 나눠 주다 보니 살림은 항상 쪼들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난 선생의 부인 또한 궁색한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장맛비가 계속하여 쏟아지는 날이었다. 낡은 초가집이라 장대같이 내리 퍼붓는 장맛비에 그만 지붕이 새기 시작하였다. .
해마다 추수가 끝난 가을이면 새 볏짚으로 이엉을 이어서 새로이 초가 지붕을 얹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볏짚도 사야 하고 또한 지붕을 잇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어야 하니 검소하기 짝이 없는 선생으로서는 그것마저도 낭비라 생각하고 지난 가을에 새 지붕을 얹지 않은 탓이었다. .

이 방 저 방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처음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세수그릇을 갖다 놓고 빗물을 받아냈지만 며칠씩 연속되는 장맛비라 이곳 저곳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니 속수무책이었다..
"부인, 어서 가서 우산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우리 두 사람이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해 보도록 합시다.".
부인으로서는 심란하기 짝이 없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감께서 시키는 대로 우산을 가져와 두 내외가 방안에서 비를 피했다. .
"부인,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지 않소? 우리에겐 이렇게 비를 피할 우산이라도 준비되어 있으니 말이요.".
부인으로서는 듣기가 조금 거북한 말이었지만 워낙 성품이 그런 분이라 굳이 그 말씀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겐 우산이라도 있지만 이 장맛비에 우산마저도 없는 백성들이 집에 비가 새면 어찌하나 그게 걱정이구려." 공께서 그리 말씀하시자 부인께서도 그만 불평을 토하고 말았다. .
"비가 새는 방안에서 우산으로 빗물을 받는 일이 어찌 다행한 일이라 말씀하십니까. .
우산이 없는 이들은 미리미리 알아서 다른 방도를 썼을 테니 대감께서는 마음을 놓으셔요."하였다. .

하정 유관 선생의 외손(6대손)으로서 조선시대 실학파의 선구자인 지봉(芝峰) 이수광(李睡光)은 공이 거주하던 옛 집터에 하정선생을 기리는 정자를 지은 다음 '비우당(庇雨堂)'이라는 현판을 달아 공의 덕과 인품을 후세에 전하였으며 낙산 변두리인 신설동 지역을〈우산각 골〉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