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의 충절이 서린 왕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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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찌 이렇게 허망하게 왜놈들에게 유린당할 수 있습니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한데 백성들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소이까?"
"우리도 이젠 의병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의병을 먹이고 훈련하는데 드는 곡식이며 경비는 어떻게 마련한단 말이요?"
경상도 선산 땅 허위의 집에서는 밤늦게까지 지역유지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명성황후가 일본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집주인이며 좌장 격인 허위는 어려서부터 영특하다고 근동에 소문이 날 정도로 똑똑하여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읽고 해석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고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수련한 학문으로 서당을 차려 오로지 후학을 가르치는 데만 전념하였다.

"권문세도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조정, 특히 외척의 횡포가 심한 조정에는 들어갈 뜻이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러한 허위가 지역유지들과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 것은 비록 조정에서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왜놈들이 대궐에 침입하여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천인공노할 사건 때문이었다.
"저들의 만행이 아무리 심하기로서니 어찌 국왕폐하가 계신 대궐을 범하여 일국의 국모를 시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실을 알고서도 백성들이 가만히 있다면 이 백성이야말로 죽은 백성이나 다름이 없다. 설령 일본의 뒷 조종을 받는 조정이 우리의 갈 길을 막는다 해도 우리가 흘리는 피는 애국의 피요, 우리의 의기와 충절은 만고에 빛날지어다."
허위는 그렇게 창의문(倡義文)을 써서 각 곳에 게시했다. 그가 금산(오늘의 김해)에서 그곳 출신 이기찬과 의병을 모았을 때 300여 명의 의병이 참여하여 금산군의 관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금산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한양으로 올라오기 위하여 성주(星州)로 진격하다가 첫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300명의 급조된 병력으로 1,200명의 관군을 대적한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허위는 그 후 김천 직지사에 은거하여 다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무렵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회유하였다. 비록 그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대항하여 싸우기는 했으나 그의 충절만은 높이 샀던 까닭이었다.
허위는 출사를 하여 1899년 영희전봉사에 임명됐다. 그 때부터 1904년까지 그가 평리원(平理院)의 수석판사를 역임하는 등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그가 봉건적인 유림에서 근대지향적인 유림으로 탈바꿈을 하는 시기였다.
그는 1904년 8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있을 때 신식학교 설치, 화폐제도 개혁, 신분제 폐지 등 개혁적인 안을 조정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1907년 경기도 연천, 적성 등지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 수가 천명에 이르렀다. 허위는 강원도 원주 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하는 이인영(李麟榮)과 협의하여 13도 의병을 통합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펴기로 하고, 그해 11월에 경기도 양주에 13도 창의대진소(倡義大陣所)를 편성했을 때는 병력규모가 10,000명에 다다랐다.
허위는 자기보다 규모가 큰 부대를 이끈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장의 직책으로 동대문을 향하여 출발하려던 중에 공교롭게도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이 별세했다는 부음을 접하여 귀향을 해야할 형편에 이르자 허위가 총대장이 되어 1만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충절의 기상으로 뭉치긴 하였으나, 훈련되지 않은 민병이었고 무기 또한 창과 방패 등 낡은 것들이어서 신무기를 소지한 관군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그의 부대는 결국 패퇴하였고 그 후 임진강 쪽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일대에 군정(軍政)을 펼칠 정도로 기세를 살렸으나 1908년에 일제에 체포당하여 그 해 9월 27일에 교수형에 처해 졌다.

초야에 묻혀 부모에게 효도하며 후학이나 가르치면서 살아야 했던 한 선비가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나 손에 잡았던 책 대신에 창칼을 잡아야 했던 허위의 일생이야말로 안보의식이 절박히 요구되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허위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왕산 허위가 의병을 이끌고 그토록 밟고 싶어했던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 도로 이름을 '왕산로'라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