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보리밥과 가평현감

행복을 여는 동대문구

꽁보리밥과 가평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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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조대왕때 영의정을 지냈던 오성 이항복 대감께서 경기도 가평으로 여름휴가를 가던 길이었다.
대감께서 공무가 아닌 사행길이라 평복 차림으로 그 당시 고관들이 행차할 때 타던 가마 대신에 조랑말을 타고 하인 한명을 앞세워 길을 떠났다.

창덕궁 앞을 지나 동대문을 빠져 나오니 좌측으로 낙산이 보이고 저만큼 낙산 아래 조선초기에 대학자이며 또한 청백리로 후세에 널리 알려진 하정 유관 선생을 기리는 우산각 정자가 보였다.
오성 대감은 잠시 말에서 내려 우산각 쪽을 향하여 예를 표했다.
자신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청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묻지 않고 항상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평등하게 대하셨다는 하정선생의 높은 덕을 숭모해 왔던 터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엄격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출신성분이 중시되고 양반집 후손이라 하더라도 서출(본처가 아닌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재주가 좋아도 관리에 등용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하정 공께서는 반상의 구별이 없이 모든 백성을 온화한 성품으로 감싸셨으니 나 또한 공의 덕을 본받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가다보니 어느새 용머리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용머리 마을 중간쯤에는 용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는 전설을 가진 찬우물내기가 있었다. 물맛이 참으로 좋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마침 우물가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옹기동이에 물을 긷고 있었지만 평복을 한 오성대감을 알아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저기 우물에서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 가자꾸나."
대감은 하인을 시켜 물 한 바가지를 얻어 오게 하여 물을 마신 뒤에 다시 길을 재촉했다.
얼마쯤 가다보니 이번에는 사도세자 묘가 있었다는 배봉산이 나타났다. 거기에서부터 한양 땅이 아니라 경기감영에 속한 양주 땅이었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대왕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 훗날 자신이 죽은 후에 묻힐 묘터를 찾아 근심을 하며 다니다가 현재 동구릉이 있는 양주땅에 묘터를 정하고 돌아오며 일행들과 잠시동안 쉬면서 근심을 잊었다하여 '망우리(忘憂里)'라 칭했다는 고개를 넘었다.
또 얼마쯤을 가다보니 여름이라 날씨가 덥기 전에 길을 나선다고 아침밥을 너무 일찍 먹어서 그랬는지 배가 고팠다.
대감께서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강가에 주막집 한 채가 눈에 들어 왔다.

대감께서 하인을 앞세워 주막집에 당도해보니 새로 가평현감으로 부임하는 신임 현감의 깃발이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오성대감은 잠자코 주막집에 들어서며 주막집 주인을 불러오기를 청했다.
"여보시오. 주인장, 밥을 한 상 차려 주구려."
그러나 주막집 주인은
"이걸 어쩌나! 죄송합니다만 우리 집에는 영감님께 드릴 음식이 없습니다."
주막집 주인이 거절을 하는 것이었다.

"주막집에 음식이 없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기요?"
대감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죄송하지만 좀더 가시면 다른 주막이 나올 테니 그 집으로 가시지요."
"주인장 그럼 저기 저 사람들이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고 무엇이오?"
대감께서 주막집 마당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도 신임 현감을 수행하는 일행인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저 음식은 우리가 내놓은 것이 아니고 새로 사또로 부임하시는 어르신께서 한양 본댁에서 준비해 온 것입니다."
"아니? 그럼 이 집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요? 내가 너무 시장해서 그러니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가져오시오."
대감께서 사정을 하셨다.

주막집 주인이 노인의 행색을 자세히 보니 연세도 지긋하신데 오죽이나 시장하시면 저러실까 생각하니 측은하게 여겨졌다.
"영감님 정 그러시다면 방에 들어가십시오. 비록 보리밥이긴 하지만 아침에 우리가 먹던 식은밥이 조금 남아 있으니 제가 부엌에 가서 상을 차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며 대감을 사랑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주막집이란 본래 누구나 먼저 와서 앉은 사람이 아랫목을 차지하는 법, 대감께서 방에 들어가 보니 방 아랫목은 이미 신임현감 일행이 차지하고 앉아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먹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방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밥상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려온 밥상을 보니 꽁보리밥 한 덩어리에 보리된장 한 접시 달랑, 그리고 찬물 한 그릇,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시장하니 잡수실 수밖에 대감께서 꽁보리밥에 시커먼 보리된장을 비벼
서 맛있게 먹고 있을 때였다. 아랫목에서 식사를 하던 신임현감이 대감을 불렀다.

"노인장!"
"어찌 나를 부르시오?"
"노인장께서 먹는 음식이 무언지 모르지만 무척 맛이 있어 보이는데 나도 그 밥을 한술 얻어먹을 수 있겠소?"
"그러시구려. 사람이 먹는 밥을 사람이 조금 나눠 먹자 하는데 인정상 어찌 안된다 하겠소이까? 기꺼이 드리리다." 하며 대감은 그릇째로 신임현감 앞에 내밀었다.
현감이 그걸 받아서 보리된장에 범벅한 식은 보리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씹어보니 맛은 커녕 입안에 보리알이 와글와글, 거기다 시큼털털한 보리된장 맛이 얼마나 역겨웠던지 대감이 보는 앞에서 그만 퉤! 하고 입 속에 있던 것을 뱉어 버렸다.

꽁보리밥과 가평현감 이미지

"노인장 내 노인장 형색을 보니 그렇게 안 보이는데 딱하기 짝이 없구려 이런 걸 음식이라고 먹는 걸 보니…"하며 힐난까지 했다.
하지만 대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남은?보리밥을 다 먹고 나서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얼마쯤 가다가 하인을 주먹집에 있는 현감에게 보냈다. 하인이 신이 나서 뛰어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리 오너라. 영의정 오성 대감님의 지엄하신 명이시다. 신임 가평 현감은 내일 모레 정오에 가평에 있는 김판서 대감 사저 정문에 대령하랍신다."

신임 가평 현감은 눈앞이 아찔하였다.
"아니! 그 노인이 영의정 오성 이항복 대감이시라니? 이거야말로 큰 일이구나!"
이젠 죽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하늘같은 영의정 대감의 명이니 어찌 안 갈 수가 있겠는가. 가슴이 덜덜 떨렸다.
한편 오성대감은 주막집을 나와 또 얼마를 가다가 느티나무 그늘에서 입에 장죽을 물고 쉬고 있는 선비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추었다.
"선비 양반, 담뱃불을 좀 얻읍시다."
대감께서 긴 담뱃대에 연초를 재면서 담뱃대를 물고 있는 선비에게 말을 건넸다.
선비가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건네며 말했다.
"노인장께서는 이 더위에 어디를 가시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 길손끼리 만났으니 통성명이나 하고 가십시다. 저는 청평에 사는 조길생이라 합니다. 노인장의 존함은 어떠하신지?…"
"나 말씀입니까? 내 이름은 이항복이라 합니다."하고 답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선비의 안색이 달라졌다.
"노인장. 거참! 노인장 이름자를 바꾸셔야 하겠소이다."
"아니! 내 이름자를 바꾸라니? 그게 어찌된 말씀이오?"
"조금 전에 이항복이라 하셨잖소이까?"
"그랬소. 내 이름이 이항복이오. 그런데 선비께서 느닷없이 남의 이름을 바꾸라니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노인장 함자가 이항복이라니까 내가 하는 소리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신 영의정 대감의 함자를 쓰다니 너무 무엄하지 않소이까?"하는 것이었다.
대감께서 그 소리를 듣고 선비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니 일자로 다문 입이며 선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선대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어찌 그리 쉽게 바꿀 수 있겠소? 이름을 짓다보니 그리 된 걸 가지고…"
대감께서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선비는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오성대감은 모든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국노(國老)이시오. 아무리 노인장께서 늙으셨다 하더라도 노인장으로 인해 그 어르신의 존함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안되는 일이오이다. 꼭 그렇게 하셔야 하오이다."하며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예, 선비 말씀은 나중에 생각을 해보리라."하고 대감은 그 자리를 벗어나 얼마나 가다가 하인을 시켜 그 선비에게 영을 내렸다. 하인이 신이 나서 뛰어가 선비에게 전했다.
"선비는 듣거라. 영의정 오성대감님의 지엄하신 명이시다. 내일 모레 정오에 가평 김판서 사저로 선비는 반드시 대령하랍신다."
선비 또한 그 소리에 가슴이 덜컹하였다. 내가 영의정 어르신을 몰라보고 무엄하게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니 아무래도 치도곤을 당할 것 같았다.

드디어 약속된 날 정오에 김판서 사저에는 문제의 신임 현감과 선비가 자리하고 오성대감을 기다렸다.
영의정 오성대감께서 문을 열고 나타나 먼저 현감에게 말했다.
"신임 가평 현감 윤아무개 듣거라. 그간 계속된 흉년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졌거늘 목민관의 신분으로서 가난한 백성들이 상시로 먹는 보리밥 한 술을 못 삼키고 뱉으니 네 어찌 백성들의 고달픔을 헤아리겠는가? 이 길로 너를 가평 현감에서 파직하니 한양으로 즉시 돌아가 네 아비 윤승지에게 가서 내가 아직은 네가 관직에 오르기는 이르다 하더라고 전하여라."하고서 이어서 선비에게 말했다.
"선비 조길생은 듣거라. 그대는 품성이 따뜻하고 인정을 베풀 줄 알며 무릇 사물을 보는 눈이 바르니 내가 그대를 임시로 가평 현감으로 봉하고 한양에 가서 임금님께 고하여 교지를 받아 내려 보낼 터이니 이제부터 어진 백성들의 아픔과 고달픔을 보살피는 목민관으로서 본분을 다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