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김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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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김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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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의 예능보유자로 1995년 6월 지정된 김학석(62, 현 동대문문화원 이사)씨는 이문2동에서만 무려 40여년을 살고있는 우리고장의 자랑스런 문화예술인이다.

송파산대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반주음악에 맞추어 춤이 주(主)가 되고, 재담과 소리와 동작이 곁들이는 탈춤놀이의 일종이며, 그 주제를 보아서도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의 중부형(中部型)의 한 분파이다. 그 특징을 보면 먼저 송파산대놀이의 가면의 수는 33개이며, 가면의 제작수법은 양주별산대 탈과 같으며, 바가지탈이다.

다만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이미 없어진 당녀(唐女), 해산어멈, 신할멈, 무당탈 들이 남아 있고, 놀이 과장(科場)에서도 이들 탈들이 맡는 역이 따로 있어 송파산대놀이가 비교적 고형(古型)을 보존한 대목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놀이순서를 보면 먼저 길놀이, 서막으로 고사가있고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중, 제3과장 연잎과 눈끔쩍이, 제4과장 팔목중 제1경 북놀이, 제2경 곤장놀이, 제3경 침놀이, 제5과장 노장 제1경 파계승놀이, 제2경 신장수놀이, 제3경 취발이놀이, 제6과장 샌님 제1경 의막사령놀이, 제2경 샌님과 미얄할미, 제3경 샌님과 포도부장, 끝으로 지노귀굿이 있다.
송파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와 함께 서울과 경기도지방에 드물게 살아 남은 탈놀이 중의 하나이다. 탈놀이의 성립에 관계되는 문헌이나 신빙성 있는 증언은 찾을 수 없고, 다만 양주의 경우와 같이 조선 후기에 서울이나 그 주변에 거처하던 본산대패로부터 분파되거나 놀이를 전수받아 생긴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송파는 옛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수운(水運)과 육운(陸運)의 동쪽 거점으로서 큰 향시가 개설되었으며, 서울로 공급하는 경기미,숯,장작,건축재,소,곡식,채소,어물 등이 이곳을 거쳐갔으므로 언제나 성시를 이루었다. 5일장으로 사흘간 계속되는 이곳은 우시장이 매우 컸으며, 관리 등으로 붐볐다.

순조 9년(1809)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적국 1,061개의 향시(鄕市) 가운데 송파장은 최대 시장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송파장에서 독과점 판매사건 등 상거래 질서를 문란시키고 있는 각종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던 또 다른 기록에서 보더라도 유통면에서나 경기면에서 송파장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은 이러한 지역적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 노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시장 상인들의 지원과 협조에 의해 놀이가 발전적으로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파산대놀이의 성립 이전에는 본산대패의 순회공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옛 연희자인 조영완[曺永完 (1865~1949)], 윤종현[尹宗鉉 (1880~1953)], 김도환[金道煥 (1889~1951)]의 연령에 비추어 보면 대체로 양주별산대놀이의 성립과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초 , 중엽에 본산대를 모방하여 송파산대놀이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강의 철교 가설(1900. 7), 경부선 개통(1905. 1)으로 육운과 수운은 퇴조하게 되었다. 게다가 송파의 인근인 천호동에 큰 시장이 형성되고, 숭인동에 우시장이 생기자 송파의 경기는 급속히 후퇴하였다. 근근히 옛날의 잔영을 이어가던 송파장은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래서 홍수 이전의 마을을 구송파, 그 후 새로운 마을이 생긴 현재의 가락동 일대를 신송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17세 때에 대홍수를 겪은 놀이꾼 한유성[韓有星 (1908~ )]의 회고에 의하면 구송파 시절에 시장 경기가 점차 퇴조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큰 장이 섰으므로 탈놀이판의 분위기나 규모는 괄목할만 하였다 한다. 정월대보름,사월 초파일,오월단오,칠월백중,팔월 추석에 주로 놀았는데, 송파의 놀이꾼 뿐만 아니라 인근의 놀이꾼(주로 퇴계원산대패)들도 초빙하여 함께 놀기도 하였다.

당시의 놀이꾼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조영완 , 윤종현 , 김도환 이외에 박희선(朴希先) , 유천식(柳千植) , 김동현(金東鉉) , 배운학(裵雲鶴) , 채팔봉(蔡八峰)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주로 싸전에서 되질을 하는 되쟁이, 배에다 물건을 싣고 내리는 임방꾼, 술장사, 소규모의 가게 등을 하던 서민층이었다.

대홍수 이후 신송파에서는 한두번 놀이판을 벌였으나 놀이패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그 대신 1930년대 초부터 돌마리(석촌리)에서 탈놀이가 재기되어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왕성하였는데 구송파시대의 놀이꾼인 윤종현이 초청되어 춤과 놀이의 진행을 지도해 주었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돌마리마을 가운데 마당에서, 겨울에는 백사장에 움집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놀았다. 돌마리 놀이패에는 김순길(金順吉) , 정희성(鄭熙成) , 이범만(李範萬) , 엄준근(嚴俊根) , 여태산(呂泰山) , 심재석(沈在錫) , 한유성(韓有星) 등이 있었으며 그 중 이범만은 1973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최근까지 활약하다 작고하였다.

신송파 시기에 와서 탈놀이가 돌마리 사람들에 의해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측면과 예능적 측면에서 조건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돌마리는 옛부터 돌밭이 많은 밭농사지역으로 대홍수의 피해도 별로 받지 않아 농사에 의한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였다. 예능적인 측면에서는 답교놀이가 돌마리와 인근 몽촌리에서 오랫 동안 전승되어 왔으므로, 이러한 지역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주민들이 놀이에 대한 신명이 높았고, 또한 음악적인 예능도 성숙되어 있었다.

일제말기에 중단되었던 돌마리의 탈놀이는 광복 이후 6,25전쟁까지 몇차례, 그로부터 3, 4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몇차례 놀았다. 1963년 제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를 계기로 허호영(許浩永)을 중심으로 송파산대놀이의 복원작업이 본격화되었고 마침내 1973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1975년 성동구 신당동에 처음 전수소를 설치한 이후 수차에 걸쳐 전수장소를 옮겨 다녀야 했던 연희자들은 1984년 11월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호수공원에 위치한 서울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게 됨으로써 비로소 정착된 활동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송파산대놀이의 공식명칭은 송파민속보존회로 되어 있다. 그것은 송파산대놀이와 답교놀이를 모두 전승하고 있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붙인 명칭이다. 문화재 지정 당시의 예능보유자로는 작고한 이범만 , 김윤택[金潤澤 (1904~1979)], 도중에 탈락된 허호영(1914~ ), 한유성(1908~ ), 이충선[李忠善 (1901~ )], 문육지[文陸地 (1913~ )]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이윤성[李允成 (1918~ )], 김학석, 이병옥(李炳玉), 안병인, 김명하, 함완식, 전철규, 홍명자, 이수환, 이현숙, 윤효경 등 유능한 연희자들이 놀이를 익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