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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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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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휘경2동, 전농동, 답십리에 걸쳐있는 배봉산은 예전에는 경기도 양주 땅이었다. 이 산이 배봉산(拜峰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사도세자의 무덤이 그곳에 있어 서울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향하여 절(拜)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도세자는 조선시대 영조대왕의 아들로서 후세 사람들에게는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왕세자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아들이 아무리 아버지의 말씀을 잘 따르지 않고 자식이 제멋대로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일반 사가가 아닌 대궐 안에서 그토록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참으로 부끄럽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조선왕조 제21대 임금으로서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이었다. 임금 재위기간도 무려 50년이나 되었으니 요샛말로 장기집권을 한 셈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 11년인 1735년 1월에 후궁인 영빈 이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왕비에게서 태어난 이복형 효장세자가 10살 때 죽고 난 뒤이고 영조대왕이 이미 40세가 넘어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2살 때에 왕세자로 책봉을 받게 되었다. 세자는 머리가 총명하여 3살 때 이미 임금 앞에서 효경(孝經)을 외워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7살 때 동몽선습을 떼어서 대궐에서 책 씻기 떡을 만들어 조정백관들에게 나눠주며 축하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조정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을 일삼았고 당시 정권을 잡은 노론은 영빈이씨 소생인 사도세자가 너무 어리다는 핑계로 노론파의 종가(宗家) 중에서 세자를 추대하였으나 영조대왕이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사도세자를 책봉한데 대해 불만을 품고 걸핏하면 세자를 모함하고 비방하였다.

사도세자가 10살 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층인 노론이 주축이 되어 처결한 신임사화(申壬史禍)를 비판하자 노론측은 영특한 세자가 이 다음에 장성하여 즉위를 하게 되면 뒤탈이 날 것을 걱정하여 더욱더 세차게 임금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대왕으로부터 세자가 자꾸만 눈밖에 나도록 부추겼다.
사도세자가 15살이 되던 해에 영조대왕께서 잠시 왕위에서 물러나 사도세자에게 임금을 대신하여 청정(聽政)을 시킨 적이 있었다. 세자에게 군왕으로서의 훈련을 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러자 세자를 무고해 왔던 노론과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가 궁녀를 함부로 죽이고 여승을 대궐에 불러 들였다고 왕에게 고자질을 하여 영조대왕이 크게 노하도록 만들었다.
세자가 27살이 되던 해에 무료한 세자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 평안도 지방을 순방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것을 꼬투리 잡아 반대파인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가 여행 중에 체통에 벗어난 행동을 했다고 영조에 고해 바쳐 세자의 일행으로 동행했던 사람들이 관직에서 파직 당하는 일조차 있었다.

그 이후 계속해서 노론과 결탁한 왕후(계비 김씨)와 영조대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숙의 문씨 등의 모함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왕의 노여움은 극에 달해 사도세자는 시름시름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장성한 세자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병까지 났겠는가 마는 권력다툼이란 원래가 끝이 없는 법, 노론에 의한 세자에 대한 공격은 끊일 날이 없었다.
끝내는 영조 38년 윤 5월에 노론측의 윤급(尹汲)이 나경언을 시켜 세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거짓말을 하게 하여 분노한 영조는 세자를 폐위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세자의 변명을 영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창덕궁 휘녕전 뜰 앞에 커다란 널빤지를 깔아놓고 칼을 빼든 채 세자에게 자결을 하라고 명했다.

"아바마마. 제가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아바마마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아버지 말씀도 잘 따를 것이니 이리 마옵소서"(한중록에서) 하며 자결할 것을 명한 아버지 영조대왕에게 혈육의 정을 호소하는 28세의 사도세자. "동궁저하가 비록 덕을 잃은 점이 있더라도 전하께서 지극히 인자하심으로 동궁이 바른 길로 가도록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서 6품직인 임성이 통곡하며 영조에게 간청을 했지만 영조는 세자를 변명하거나 두둔하는 신하들을 그 자리에서 줄줄이 파직시키면서 계속하여 자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부자관계는 하늘이 정해준 것인데 어찌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겠습니까?"하면서 대궐 밖에 나가 자결 하겠다고 맞섰다.

승강이는 오후 늦도록 휘녕전 앞뜰에서 계속되었고 사도세자가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매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세자의 안타까운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신하가 세자의 장인(한중록의 저자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에게 나서 줄 것을 권했으나 홍봉한은 "전하의 분부가 너무 지엄하여 나도 어쩔 수 없다."며 꼬리를 뺐다.
홍봉한 그 역시 노론의 한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자신의 사위인 세자의 목숨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는데도 장인된 사람이 모른 척했으니 권력이란 그토록 비정한 것이었다.
영조는 신하들을 시켜 대궐에 있는 뒤주를 내오라 하여 세자에게 그 속에 들어가라고 명하였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영조가 설마 자식인 세자를, 더구나 28세의 나이인 세자를 뒤주 안에 가두어 죽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세자는 몇 번이나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둥질 쳤지만 소용없었다. 뒤주 안에 들어가서도 몇 차례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영조는 신하들을 시켜 널빤지와 대못, 굵은 새끼줄을 가져오라 한 뒤 직접 뒤주를 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