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귀비의 무덤, 영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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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귀비의 무덤, 영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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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 청량리2동으로 편입된 홍릉 일대는 원래 조선왕조 왕가 소유 국유림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구획정리가 되어서 분간하기가 쉽지 않지만 홍릉 일대는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내려 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야산지대로서 왕가에서 주로 능 터로 사용했던 곳이다.
천장산 동쪽 끝은 조선조 20대 임금인 경종의 무덤(의릉)이 있고, 구한말에 명성황후의 무덤(洪陵)을 이곳에 씀으로써 홍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이곳에 묻힌 지 10년 후 고종의 후궁이며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던 순헌귀비 엄씨 또한 명성황후의 무덤과 이웃 한 이곳에 묻히었으니 조선조 때, 특히 구한말에 더욱 명당으로 여겼던 것 같다.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건물 옆에 붙어있는 영휘원이 곧 엄귀비의 무덤이다.
엄귀비는 평민출신인 영월 엄(嚴)씨 엄진삼(嚴鎭三)의 딸로서 5세 때 아기나인(內人)으로 대궐에 들어왔다. 후에 왕후인 민비의 총애를 받아 민비의 시위상궁으로 발탁되었는데 시위상궁이라 함은 사가로 말하면 몸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처지에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고종임금과 동침을 했다. 그녀는 인물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또한 임금과 동침을 해서 승은을 입었을 때는 당시 국민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였던 시절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런 궁녀가 어느날 아침 갑자기 임금님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으니 대궐 안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밖에.
(그 당시 궁녀가 임금님의 승은을 입게 되면, 다시 말해 임금님과 동침을 하게 되면 그 사실을 대궐 안에 널리 알리기 위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상감마마께서 귀신한테 홀리셨나? 저렇게 늙고 못생긴 여자를 왜 건드렸지?"
"혹시 거짓부렁으로 저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왕후 민비도 처음엔 엄상궁이 워낙 자신과 가까워서 믿어왔던 사이였고 또한 엄상궁이 늙고 못생겨서 임금님께서 탐을 낼 까닭이 전혀 없다고 믿었기에 자기 가까이에 둔 것인데 상상해본 일조차 없었던 배신행위가 일어난 것이었다. 민비가 얼마나 분노했던지 직접 매를 치려고 형틀을 차리라고 명령했다.
"네 이년. 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차라리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였더라면 그녀의 분노가 덜했을지도 모른다. 늙고 못생긴 엄상궁을 임금님께서 건드렸다는 것은 민비로서는 배신감은 물론이려니와 자존심마저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후 민비의 분노는 고종임금의 철저한 사과와 통사정으로 거두어 드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녀에게 형벌을 가하지 마시오. 짐이 다시는 엄상궁을 가까이하지 않으리다."하며 사정을 하고 다짐을 했다.
"그러하시다면 엄상궁 저 개보다 못한 것을 대궐 밖으로 즉시 내쳐 주시오."
민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엄상궁은 그 길로 대궐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10년 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살해된 후 5일만에 엄상궁은 대궐에 다시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일본인 폭도들이 대궐에 침입하여 한 나라의 국모인 왕비를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대궐 안에는 공포 분위기가 짙게 깔렸다. 잘못 하다가는 고종임금마저도 저들에 의해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엄상궁은 이때 기지를 발휘하여 당시 일본보다는 힘센 나라로 여겨졌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임금을 빼돌렸다.
후에 '아관파천'이라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사건은 엄상궁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가마 속에 고종을 태우고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던 사건이다.

국왕이 옮겨갔다는 것은 정부가 옮겨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즉시 그 당시 친일내각의 수반이었던 김홍집을 제거하고 친일내각이 만든 각종 정책을 폐기시켰다.
그로부터 만 1년 동안 고종은 엄상궁과 함께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러시아공사관에서 정무를 보게 되었고 엄상궁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가 곧 영친왕(英親王)이라 불려졌던 영왕(英王)이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 궁녀 장씨 소생 의친왕, 엄귀비 소생인 영왕, 그리고 나중에 양비에게서 낳은 덕혜옹주 뿐이었다.
순종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후계자인 왕세자를 책봉하게 되었을 때 10살이나 손위가 되는 의친왕을 제치고 엄귀비의 뜻대로 2살 먹은 어린 영왕이 황태자로 책봉됐다.

고종은 1897년에 '조선'이라는 국호(國號)를 버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고쳤다. 참으로 획기적인 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500년 가까이 청나라를 대국大國)으로 섬기면서 청나라 황제와는 동격일 수 없다는 사대사상에서 임금을 '황제'라 칭하지 못했고 '왕(王)'이라 부르면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의 '제국(帝國)'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국력이 쇠잔하여 바람 앞에 촛불처럼 약해졌으므로 이 기회에 완전한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고자 '대한제국'이라 했던 것이다.

엄귀비의 무덤, 영휘원 이미지

임금을 황제라 칭하고 왕세자를 황태자로 높여 불렀던 대한제국(1897)이 한일합방(1910)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길 때까지 대한제국 13년은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기틀을 갖추어가던 때였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있은 후에 일본은 고종황제를 태왕(太王)으로,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 양위를 받은 순종은 조선왕이라 칭하고 황태자는 영친왕이라는 호칭으로 강등시켰다.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조선총독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황실에 볼모로 잡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아들마저 저들의 볼모로 잡힌 엄귀비의 고통이야 오죽했으랴! 엄귀비는 소중한 황태자인 자기 아들이 겪기 힘든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에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광경을 고종과 함께 대궐에서 활동사진(영화)으로 보다가 얼마나 애통했던지 입에 물고 있던 떡에 급체하여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났다.

엄귀비는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후에 숙명으로 개명함)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양정의숙(현재 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00만 평의 땅을 기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