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승천한 용두리 찬물내기

행복을 여는 동대문구

용이 승천한 용두리 찬물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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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적으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은 북악산 줄기에서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구릉 가운데 하나인 산자락을 중심으로 생긴 분지에 동네가 형성되었고, 동네를 감싸고 지나가는 뒷산은 마치 용이 꿈틀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종로쪽으로 향한 동네의 진입부분은 용의 머리에 해당되므로 '용두마을'이라 했다.

전설에 따르면 용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용과 관련된 지명이 있는 곳은 부근에 샘이나 하천 등이 많다.
'용두동'지역에 있던 '찬물내기'와 '찬 우물' 역시 이런 전설들과 관련이 있는데 이곳의 우물물은 물맛이 달면서, 여름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왔지만, 이상하게도 겨울엔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따뜻한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의해 이 우물에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데 한양의 외지(경기 동부지역 및 강원과 영남 이북지역)에서 한양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손들은 반드시 이 물로 목을 축이고 성 내로 들어갔는데, 이 물을 마시고 성안으로 들어가면 계획했던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때문에 이 동네에는 오래 전부터 장거리가 형성되었으며 주막집들도 많이 생기게 되었고 이른 새벽이면 서로 먼저 이 우물물을 마시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이 있는 경우 대개 무과(武科) 응시생은 남대문(숭례문)으로 입성했으며, 문과(文科) 응시생은 동대문(흥인지문)으로 입성했는데, 용두동에 이르러 찬 우물물을 마시고 과거에 임한 응시생들은 모두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의 동교에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하는 선농단을 모시고 해마다 경칩 이후 첫 번째 맞이하는 돼지날, 12간지 중의 해일(亥)에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내고 밭을 갈아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렸다.

태조가 이 행사를 위하여 선농단으로 행차하던 도중 '용두골'에 이르러 소문난 찬물내기 물을 한잔 청하자 이에 신하가 정갈하게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임금님께 올렸다. 태조가 그 물을 받아 마시고 과연 용두리 찬물내기 물맛에 감탄을 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찬물내기 우물에서 두 마리의 용이 솟아 우물을 한바퀴 돌고 나서 하늘로 승천을 하였다.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태조는 타고 가던 가마에서 간단히 예를 갖추어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선농단에서의 제사와 임금님의 친경의식도 이런 이유로 시작된 것이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물이다. 때문에 비가 오느냐 날씨가 가문가에 따라 풍년과 흉년이 결정되기 때문에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가물기 시작하면 나라에서 산천과 요소 요소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오행설에 따라 한양의 다섯 지역에서 단을 쌓고 흙으로 용의 모양을 만들어놓고 비오기를 바라는 오방토룡제를 지냈다.
오행에 의해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룡, 남쪽은 적룡, 북쪽은 흑룡, 중앙은 황룡으로 색을 정하고 있는데 그 중 동쪽에서는 선농단 옆에 토룡단을 만들었고 행의 원리에 따라 '동방청룡단'이라 불렀다.
이 제사는 조선조 제3대 태종 임금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신기하게도 이 제사를 지낸 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또 하나 이 제사를 지낼 때 동쪽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색동옷을 입힌 후 용 모양을 들고 이틀동안이나 교대로 춤을 추게 하였다.

용두동 지역은 물과 연관이 있는 용머리에 해당해서 일까. 물난리가 날지언정 불로 인한 난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6.25동란 중에도 용두동 지역은 불에 탄 집이 없을 정도로 화재 안전지역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