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묘에 얽힌 옛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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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회기동

현재는 천장산 아래 경희대학교가 위치하여 큰 터를 잡고 교육의 요람으로써 뿐 아니라 동서양방을 겸한 병원, 예술 문화공연장인 평화의 전당 등을 건축하여 그 일대가 번창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가 있던 곳으로 '회묘리'라 불렸다.
후세에 '폐비 윤씨'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알려진 성종의 왕비 윤씨는 원래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갔으나 성종 5년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숙의였던 윤씨가 아들을 낳아 원자가 되었으므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 윤씨는 숙의로 있을 때부터 임금인 성종의 총애를 받기 위하여 다른 후궁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유별나게 투기가 심했고 원자를 낳은 뒤부터는 더욱 교만하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아 왕비로서 갖춰야 될 덕을 잃기 시작했다.
윤씨가 왕비로 책봉된 이후에도 궁중에는 '익명서'라 일컫는 투서와 온갖 비방 모략이 왕비 윤씨에게 집중되었고 왕비 윤씨와 연관되어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야기 중 일부는 명확한 사실로 판명되어 성종의 노여움을 여러 번 샀다.
그때마다 성종은 왕비 윤씨의 너그럽지 못한 성격에 대해 주의를 주었으나. 왕비 윤씨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포악스러워지자 성종은 그녀가 왕비로 책봉된 지 3년째가 되는 성종 10년에 왕비 윤씨를 서민 윤씨로 폐출시켜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났으면 오죽이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오직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왕비 윤씨가 폐출된 뒤에도 윤씨에 대한 훼방과 중상이 끊이지 않고 더구나 그녀가 낳은 원자가 곧 세자로 책봉된다 하니 세자의 생모가 살아 있다가 나중에 세자가 임금으로 등극하면 크게 앙갚음을 당할까 두려워한 사람들이 임금에게 자꾸만 그녀에게 불리한 고변을 하여 성종 13년, 윤씨가 왕비로 책봉된 지 만 6년, 폐출 당한 지 3년 만에 그녀는 성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성종 임금은 '폐비 윤씨의 성품이 어질지 못하고 음험하며 또한 행실이 바르지 못해 왕실의 장래를 위하여 부득이 사약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전지를 내렸다.

또한 예조(禮曹)에는 폐비 윤씨가 소원하던 대로 건원릉 가는 길에 묘를 쓰게 하고 비석에는 '윤씨지묘'라고 쓰게 했다. 그러니까 묘는 일반 서민들의 묘나 다름없이 하였지만 성종은
"묘지기 두 사람을 배치하여 묘를 돌보게 하고 소재지 관원들로 하여금 한식, 단오, 추석 때마다 그녀의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되 나중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그것만은 절대로 고칠 수 없다." 라는 교지로 함께 내렸다.
그러나 윤씨의 아들인 원자가 윤씨가 죽은 다음 해에 세자가 되고 19세에 성종의 대를 이어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으로 왕위에 오른 후부터 피비린내가 나는 복수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연산군은 처음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을 강력히 다지고 전국에서 널리 인재를 구하여 등용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영주(英主)의 칭호를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차츰 자신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연민의 정이 깊어지자 왕의 가슴에는 원망과 분노가 들끓었다.
연산군 2년에 죽은 생모를 그리며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묘(私廟)을 짓고, 아울러 폐비 윤씨의 묘에 봉분을 수리하여 회묘(懷廟), 다시말해 '슬픈 사연을 간직한 묘'라는 감회서린 묘 이름을 연산군이 손수 지어 받쳤다.
연산군은 태평성대가 이어지고 왕권 또한 강력해지자 차츰 향락과 횡포를 부리게 되었고 임금 앞에서 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에게 유배를 보내거나 처벌을 일삼았다.

연산군의 복수

자연히 임금 연산군 주위에는 간사한 무리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그들의 고변에 의해 연산군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연산군 10년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라 칭하는 복수사건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출, 죽음과 연관된 모든 이들에게 사형과 유배형을 내렸고, 심지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시신까지도 땅에서 파내어 형을 가하는 가혹한 복수가 이어졌다.
그 후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를 '제헌왕후'라 추모하고 회묘를 '회릉'으로 고치고, 효사묘는 혜안전으로 승격시켰다.
원래 왕과 왕비의 묘를 가리켜 '능'이라 하고 왕의 생모나 왕세자, 세자빈, 왕세손의 묘를 '원(圓)'이라 하며, 대군이나 군, 공주나 옹주, 그리고 후궁들의 묘는 그냥 '묘(墓)'라 칭하는 것이 관례였건만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하였으며 그 이름도 회묘에서 회릉으로 고쳤던 것이다.

또한 능의 석물(石物) 또한 왕릉의 능묘형식을 따라 하게 하고 제향 절차를 종묘에 위패를 모신 역대 임금님의 제사 절차에 맞추도록 했다. 그야말로 군주가 마음먹은 대로 제멋대로 하는 전대미문의 횡포나 다름없는 억지스런 조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2년 뒤 연산군은 난잡스럽고 포악스런 군주의 전횡에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 뒤 회릉은 다시 회묘로 강봉되었다. 또한 혜안전은 철폐되어 폐비 윤씨의 위패는 묘 곁에 묻혀 있었으나 1969년 10월 양주군 서삼릉으로 이전되고 이제는 옛날 회묘가 있었던 표석만이 수풀 속에 쓸쓸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