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왕세손의 무덤, 숭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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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왕세손의 무덤, 숭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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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에 있는 영휘원 경내 입구에는 또 하나의 큰 무덤이 있으니 곧 비운의 왕세자 이은(垠)의 아들 즉 순종의 왕세손인 이진(晉)의 무덤이다. 무덤의 크기가 마치 왕릉 규모처럼 크지만 그 무덤의 주인 이진은 겨우 8개월 된 아기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엄귀비의 아들인 이은(垠)이 2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일제에 의해 영왕이라 불리어졌다.

영왕은 10살 때 일본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황실의 볼모로 잡혀가 그 후 계속하여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의 흉계로 일본황실의 방계 황족인 마사꼬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곧 이방자 여사이다.

이방자 여사는 본인의 회고록에서 일본천황의 궁내성에서 조선 황태자와의 결혼을 발표할 때까지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전혀 상의를 안 했다고 기술함으로써 일본이 당시 조선왕가에서 청혼을 해옴으로써 혼인을 발표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이 분명했다.
이은의 어머니인 엄비는 본인의 출신가문이 훌륭치 못한 것을 한탄하였으므로 장차 대통을 이을 자신의 아들을 당시 최고의 가문으로 꼽히는 여흥민씨 집안의 쟁쟁한 혼맥을 지닌 민갑완의 딸과 혼인을 시키고자 하여 이미 비밀리에 약혼선물까지 보내놓은 후였다.

슬픈 왕세손의 무덤, 숭인원 이미지

그 후 엄귀비가 죽자 약혼은 흐지부지되고 영왕은 일본의 허락이 없이는 귀국조차 못하는 신세였기에 정략결혼이 성사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조선왕자를 자국의 사위로 삼음으로써 아예 조선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더구나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마사꼬가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했으니 그들로서는 더더욱 이 혼인을 성사시키려 애썼다. 그것은 곧 조선왕가의 씨를 말리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영왕과 결혼을 한 마사꼬가 일본에서 첫아들을 낳자 대궐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들썩하였다. 아기 이름은 진이라 하고 아이는 탈없이 잘 자랐다. 하지만 슬픈 일이 생겼다.

영왕이 8개월 된 아들 진을 데리고 마사꼬와 함께 일시 귀국을 하여 큰아버지이기도한 순종에게 결혼인사차 덕수궁을 방문했던 1927년 5월에 갑자기 왕세손인 진이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인 마사꼬를 간택하여 영친왕과 결혼시켰으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던 마사꼬가 아들을 낳자 마사꼬를 진맥한 의사는 자결케하고 진은 독살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순종은 진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특별히 국상에 준하는 장례를 치러 주고 왕릉에 버금가는 묘를 쓰게 하였으니 이 무덤이 곧 숭인원이다.